백수린 작가의 작품 <여름의 빌라>를 읽었다.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울 정도의 책은 오랜만이다. 휴양지 가서 읽기 좋은 책을 검색해서 알게 됐는데, 읽다보니 재밌어서 여행가기도 전에 다 읽어버렸다. 작가 나이는 모르겠지만 <여름의 빌라> 에는 80년대에 태어난 여자 특유의 감성이 녹아있다. 난 그걸 별로 안좋아하고, 단편소설도 별로 안좋아하지만 <여름의 빌라>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단편소설이긴 하지만 백수린 작가 특유의 감성이 단편들을 하나로 묶어줘서 한권의 장편소설 같다. 그리고 외국에 살다 온 한국인이나 외국에 사는 한국인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아서 흥미로웠다. 낯선 외국에서 행복하지 않고, 귀국해서도 불행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신선했다.
어쩌다 프랑스에 살게 된 할머니 이야기가 특히 공감이 갔다. 나도 프랑스에 잠깐 혼자 산 적이 있는데 굉장히 외로웠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며 함께 대학도 다니고 피크닉, 홈파티, 여행까지 다녔는데도 그랬다. 한국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집과 독서실만 오갈 때만큼 숨막히게 고독했다. 이방인이란 그런 존재다. 아무리 활기차게 교류하고 살아도 늘 쓸쓸하다. 그래서 귀국 후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어느 밤, 갑자기 두 발이 한국땅에 단단하게 뿌리박힌 기분이 들어서 놀랐다. 한양대 근처 420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었고 비가 오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런데도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스의 푸른 잔디밭에 서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고 안정감이 들었다. <여름의 빌라>에 나오는 할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유럽의 아름다운 공원은 필요없다. 초라해도 내가 살던 집, 내 고향이 최고다. 나는 할머니도 아니고 20대 초반이었는데도 그랬는데 할머니는 오죽했을까 싶다. 아마 이웃집 프랑스 할아버지와 친해진 후에도 그 깊은 고독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인 할아버지와 친해졌으면 훨씬 나아졌을 거다.
<여름의 빌라> 에는 외국인과 결혼해서 외국에 사는 여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나도 그런 여자들과 식사한 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국 또는 유럽 남자와 결혼해서 정착하는 여자는 모두가 부러워하지만, 막상 외국에 정착하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늘 소외당하며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정말 겪어본 사람만 안다. 우리나라에 정착해서 사는 외국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섞이려고 해도 뭔가 붕뜬 그런 느낌이다. 내 나라가 있고 내 나라에서 산다는 건 정말 엄청나게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의 빌라>가 애국심을 조정하는 그런 작품은 아니다. 그냥 잔잔하게 여러 모습의 일상들을 보여주는데 그게 참 재밌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어른들의 숨겨진 아픔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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