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은 작가의 <녹슨달>을 읽었다. 녹슨달의 주인공은 '파도'라는 남자다. 파도는 그림그리는 걸 사랑하는 화가다.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화가가 아닌 하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주인집 아가씨 '사라사'와 사랑에 빠진다. 사라사는 파도만이 아니라 모든 남자들이 사랑할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아가씨다. 그러나 얄궂게도 사라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고 만다. 바로 왕궁의 기사 '폰 블레이젝'이다. 기사 폰은 파도도 반할 정도로 멋진 남자다. 그러나 전쟁터를 오래 누벼서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린 폰은 사라사를 포함하여 누구도 정상적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폰이 사랑하는 여자는 왕비지만, 그걸 알아차린 것도 폰 자신이 아니라 파도다. 폰은 왕비에게 충성을 다할 뿐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다. 그런 불쌍한 폰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아무조건없이 사랑하게 된다. 바로 사라사가 자식을 낳았을 때다. 자기 핏줄인 아기를 본 폰은 그제야 진심으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가슴으로 느낀다. 이런 애틋함을 알게 된 폰은 앞으로 전쟁터가 나가도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살아왔던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될지는 소설 속에 나오지 않지만 나는 그가 이제는 군인보다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의 길을 걸어가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 파도는 사라사를 사랑하지만 막상 그의 몸은 왕비가 취한다. 사라사는 가정이 있는 몸이기에 나름 선을 지키는 것인지 어느정도의 스킨십만 할 뿐 끝까지 가진 않는다. 어쨌든 사라사도 파도의 품에 안겨 키스를 받고, 왕비도 파도와 몸의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폰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폰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의 아내 사라사와 그가 사랑하는 왕비 둘다 파도에게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으니 폰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자신이 두 여자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랑을 파도가 대신 해주니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폰이 주인공인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사실 폰은 조연에 불과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내가 느끼기에 '시세로'다. 시세로는 파도가 애증을 느끼는 선배 화가다. 천재적인 그림 실력으로 파도에게 존경받지만 츤데레처럼 툴툴대는 성격 탓에 초반에는 파도가 심각하게 그를 오해한다. 그래도 책 <녹슨달>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왠지 이 책의 주인공은 파도가 아니라 시세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파도는 상황을 읊어주는 화자에 불과하고 진짜 주인공은 시세로 같다. 시세로는 책의 중반부터 끝까지 굉장히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파도와 사라사뿐만이 아니라 시세로와 에드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장 '벡리'의 딸 '에드나'는 성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던 시세로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놀라운 그림 실력에 빠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둘다 사랑이다. 시작은 무엇이 됐든 남녀 사이에 호감이 생기면 그 끝은 사랑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남사친 여사친에 관대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에드나와 시세로는 슬픈 사랑을 한다. 벡리가 시세로가 아닌 '레오나드'를 사위로 점찍었고 그 시대에 사는 딸들은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긴 벡리 입장에서도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사나이로 반항적인 시세로보다는 순종적인 레오나드가 적합해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순종보다 반항심이 더 필요한가보다. 책의 결말에 가보면 착한 레오나드는 힘없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만, 반항아 시세로는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언제나 그안에서 중심을 꽉 잡고 살아간다. 결국 벡리의 모든 것도 시세로가 이어받는다.
많은 스포가 있긴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책 <녹슨달>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하지은 작가의 소설들은 기승전결도 확실하고 깊은 울림이 있어서 참 좋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보다 오히려 이런 좋은 소설이 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아서 난 그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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