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은 작가의 장편소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을 읽었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은 7층짜리 저택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장편소설이지만 1층부터 7층까지 각각의 에피소드가 전개되기 때문에 무겁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가 분리되어있지 않고 '라벨'과 '마라 공작'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하나로 엮어져 있다. 게다가 1층부터 7층까지 올라갈수록 점점 실마리가 풀려나가기 때문에 탄탄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소설의 장르도 로맨스, 호러, 추리, 판타지를 아우르고 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을 읽고나면, 하지은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소원을 비는 상상은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단 하나의 소원만 빌 수 있다면 어떨까?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다면 엄청 설레고 두근거리겠지만 잔인하게도 하지은 작가는 소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에서 누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지도 알 수 없다는 설정을 해둔다. 보이드 씨의 저택에 사는 '라벨'은 저택 3층의 입주민이다. 왠지 그는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하고, 어떻게든 남들을 도우며 살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칭찬하지만 사실 라벨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소원을 비는지 그냥 아무말이나 하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라벨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소원을 비는 비극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미리 미리 알아채고 최대한 도와준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소원을 비는 현상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라벨에게 주어진 운명인가보다. 라벨이 왜 그런 운명을 지녔는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게 소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의 매력이다. 모든 것을 너무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을 순식간에 공포소설로 만드는 인물 '주스트'는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인생을 망치지 않고 끝까지 양심적으로 살았다면, 명예도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다시 만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쩐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라벨은, 주스트가 나쁜 사람인 것도 예견한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그걸 바라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주스트가 엉뚱한 걸 소원으로 빌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석에서 소원을 이뤄준다. 결국 주스트는 피눈물을 흘리며 비극적인 결말에 파묻혀 몸부림친다.
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에피소드도 있다. 5층에 사는 오드리 부인의 이야기다. 오드리 부인은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평화롭게 사는 아주머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 오드리 부인은 어린시절 만났던 소년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그 소년은 오드리에게 무지개를 선물로 준 신기한 소년이다. 오드리가 무지개를 보며 갖고싶다고 말하자 소년은 무지개를 유리병에 담아 건넨다. 참 순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덕에 오드리 부인은 고된 삶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욕망을 소원으로 빌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웠던 어린시절 추억의 조각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길 희망하며 웃는다. 심지어 목숨을 건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서도 수술이 잘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지 않는 담담함을 보여준다.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오드리 부인의 강인한 의지는 오히려 멋있을 정도다.
라벨은 소원을 이뤄주면서도 항상 마음이 슬프다.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면 보람을 느껴야 정상인데, 라벨은 늘 불행하다. 왜냐면 사람들이 정답을 말하지 않고 오답만 말하기 때문이다. 소원에도 정답이 있나 싶지만, 소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을 읽다보면 소원에도 정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사람들은 바쁘게 살다보면 잊고 만다. 하지은 작가는 이런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1층 거주민이 만들어낸 기묘한 소녀 '루이제'와 놀아준 가난한 소년을 통해 작가는 다시금 소원의 정답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상기시킨다. 순수한 소녀 루이제는 소년의 여동생을 위해 약을 살 돈을 달라고 소원을 빌지만, 소년은 여동생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게 해달라고 빈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모든 에피소드에서 사람들이 소원을 빌 때마다 라벨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정답을 말해줄 수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이 가난한 소년이 드디어 속시원하게 정답을 말한 것이다.
아버지를 지워버린 무정한 딸 '루서'도, 아내를 지워버린 '아돌프'도 정답을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서와 아돌프 둘 다 너무 아픈 사랑이라서 고통을 끝내기 위해 모든 걸 지워버리는 선택을 하지만, 사실 그건 정답이 아니다. 라벨은 마음 속으로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빌면 되는데 왜 고통을 끝내게 해달라고 비냐고 물으며 답답해한다. 아돌프는 자신이 귀족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 아내와 당당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고, 루서는 아버지의 죄가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으면 훨씬 다른 결과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 속 소원이 진정한 정답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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