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 살인의 문1> 리뷰
책 <살인의 문 1>을 읽었다. 정말 웃기는 게, 지금 작가의 나이가 64세이고 이 책이 나온 게 4년 전이라는 점이다. 어느덧 히가시노 게이고도 은퇴할 나이가 된거다. 물론 작가니까 계속 일할 수 있지만 그도 연금 받는 노인이 되어서인지, 책 <살인의 문 1>의 주제가 연금 받는 노인들이 사기당하는 이야기라는 점이 너무 재밌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인지 상상도 못하다가, 나중에 정신차려보니 사기당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된다. 아무리 돈을 꽉 쥐고 모든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노인들이라도 속절없이 당하고마는 사기극의 현장을 체험하니 무섭기까지 하다. 지금은 젊으니까 안속지만, 우리도 언젠가 나이를 먹을텐데 만약 곁에서 도와주는 자식이나 젊은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소설인 것 같다. 사실 딱히 히가시노 게이고가 교훈을 주려고 소설을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냥 재미있게 어떤 사건을 소재로 쭉쭉 써 나가는 것 같은데 의도치않게 교훈을 주는 느낌이다. 아니면 일본사람이라서? 일본 콘텐츠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게 또 잘 먹혀서 너무 너무 꿀잼이다. 요즘은 한국 콘텐츠에도 권선징악이 조금은 반영되는 듯 하지만, 역시나 한국인들은 만만치 않다. 권선징악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지에 더 치중하다보니 아무래도 일본 드라마나 애니는 사이다를 마신듯이 시원한 반면 한국 드라마나 애니는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한 느낌을 줄 때가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이 더 현실적이긴 하지만, 난 현실을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소설 속에서라도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일본물이 더 재밌다. 요즘은 또 사이다가 대세라서 한국 문화 콘텐츠에서도 고구마를 먹이자마자 바로 다급하게 사이다를 주긴 하지만 말이다.
책 <살인의 문 1>은 어느 가진 것 없는 일본 10대 소년의 삶을 담고 있다. 아무래도 작가 본인이 가난한 10대를 보낸 것 같다.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가난한 청소년이 곧잘 등장한다. 작가의 연배가 60대 중반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 시절엔 고등학교만 제대로 나와도 취업이 잘되는 시기였다고 하니 말이다. 솔직히 고등학교만 제대로 나와도 취업이 되는 사회여야 오히려 잘 굴러가지 않을까 싶다. 대학원 석박사를 따도 취업이 힘드니 모든 게 다 늦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책 <살인의 문 1>은 서슬퍼런 제목과 다르게 일본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소소하게 시작한다. 중간 부분도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한부모가정 이야기다. 거기에 호스티스 이야기가 깔려있긴 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가 푹 빠진 호스티스 '시마코'는 지나가는 인물 정도의 비중이다.
책 <살인의 문 1>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건 모두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기반이었다. 주인공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 겪으며 세상의 험한 맛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병석에 누운 할머니를 방치한 어머니, 업소녀에게 전재산을 쏟아부은 아버지, 다단계에 끌어들이는 동창, 이유없이 괴롭히는 학급 개쓰레기 학우들과 공장 동기들... 주인공은 세상에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처절하게 배운다. 어쩌다 한번씩 만나긴 하지만, 주인공 자체가 너무나도 지탱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기에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도 서서히 멀어지고 만다. 내가 당장 내일이면 노숙자가 될 판이니 사기꾼의 꼬임에 안넘어갈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기당하는 사람은 욕하면 안 된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본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주인공은 사람을 살해하려고 한 적도, 살해당할뻔한 적도 있는데도 뭔가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다. 마구 나대는 성격이 아니라 조용히 곱씹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박진감 넘치는 사건을 침착한 태도로 서술하는데도 너무너무 재밌고, 책 <살인의 문 2>를 빨리 읽고싶다.
'책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리뷰 (0) | 2023.09.14 |
---|---|
가쿠다 미쓰요 < 종이달> 리뷰 (0) | 2023.06.04 |
히가시노 게이고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리뷰 (0) | 2022.07.11 |
히가시노 게이고 < 가면 산장 살인 사건> 리뷰 (0) | 2022.07.07 |
심너울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리뷰 (0) | 2022.06.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