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소설

고호 <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리뷰

by 티라 2021. 4. 29.
반응형

고호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리뷰

과거여행사_히라이스

 

책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는 가볍고 거침없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이끌다가, 마지막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따땃하게 덥혀주면서 반전까지 확실하게 챙기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평범하고 소소하게 시작하는데, 뒤로 갈수록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마치 가볍게 떠난 산책길에서 생각치 못하게 행운을 얻은 기분이다. 사실 시간을 되돌린다는 소재 자체는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통쾌한 복수보다는 마음에 맺힌 한을 푸는 용도로 쓰인다. 한국인에게 '한'의 정서가 기본으로 깔려있어서 그런 것 같다.

여행사 '히라이스'는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과거로 잠시 다녀오게 해준다. 이곳으로 다양한 인물이 찾아와 과거로 떠난다. 대부분은 과거를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히라이스는 '고객이 지나간 사건에 함부로 개입하면 안된다'라는 규칙을 철저히 지킨다. 그래도 원하는 인물에게 조언해주는 정도는 봐준다. 내가 과거로 가서 주식을 매수하면 안되지만, 과거 속 인물에게 종목을 추천해줄 수는 있다. 책에 나오는 인물은 그 말을 믿고 투자를 해서 복을 받지만, 책이 아닌 현실에서는 자기가 미래에서 왔다는 미친놈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허경영을 믿을 것이다.

사실 난 과거로 가고 싶지 않다.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로 간다면 비트코인을 매수하겠지만, 과거여행사에서 그걸 허용하지 않으니 가봤자 달리 할 일도 없다. 아 그때 ㅇㅇ을 더 열심히 할걸.. 이런 후회가 든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재석 씨가 '그때 영어공부 할걸' 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하시면 된다. 이미 매일 아침 신문을 보고 책도 많이 읽는 분이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아 그때 게임하지 말고 생산적으로 놀러다닐걸' 이런 후회 말고는 딱히 없다. 하지만 생산적으로 놀러다니는 건 지금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말도 있다. 돌아가도 똑같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과거가 아닌 미래다.

***

권선징악

첫 에피소드는 가장 작가가 공을 덜 들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작가가 20대 여자애들이 호텔에서 파티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방에서 마음껏 수다떨고 평소보다 더 예쁘게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이는 것이지, 무슨 대단한 파티를 하려고 모이는 게 아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껄끄러운 관계라면 호텔 파티에 초대했다고 해서 모일 리가 없다. 그리고 연예인 학폭 사건이 요즘 핫하긴 하지만 모든 가해자가 다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게 아니기에, 이런 식의 결말은 큰 사이다를 주지 못했다. 차라리 웹툰 <소녀의 세계>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잘 만나고 있는데 학폭 가해자였던 사실이 밝혀져서 헤어지는 스토리가 훨씬 더 현실적인 사이다다.

나는 권선징악을 믿는다. 예전에는 바르게 살면 손해본다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바르게 사는 게 최후에 웃는 길이다. 어떤 행동을 하든 결과적으로는 미래의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 당장은 선행이 손해보는 것 같고 악행이 이득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했던 선행은 더 큰 행운으로, 악행은 더 큰 불운으로 돌아온다. 이 인과관계는 생각보다 과학적이다. 경제학에서 내쉬 균형을 배운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내쉬균형을 간략히 소개하면, 게임이 1회만 진행되면 배신하는 게 이득이지만, 여러 번 진행될수록 의리를 지키는 게 이득인 게임이다. 그 사람 한번 만나면 다신 안볼 것 같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는 복수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개인적으로는 복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복수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행이라서 미래의 나에게 좋을 게 없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나쁜 짓 한 사람들, 알아서 망해라'라고. 매우 공감되는 말이다. 그들은 알아서 망한다. 내가 나서서 복수하지 않아도.

***

 

이산가족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에피소드는 두번 나온다. 일부러 반전을 위해 두 에피소드를 떨어뜨려서 보여준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엄청난 묘사력 덕분에,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에피소드만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문장들이 다 장면을 그려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때 그 냄새, 온도, 습도' 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그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그때의 그 장소가 주는 느낌과 분위기를 딱 잡아내서 느끼게 해준다.

남북으로 헤어진 가족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남한에 살던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남한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다 감탄하고 남한이 대단하다고 느껴야될 것 같은데, 안그러니까 은근 실망한다. 반면 북한에 살던 아버지 입장에서는, 뒤에서 감시원이 쿡쿡 찔러대는 통에 솔직하게 감탄할 수가 없고 거짓말로 북한 찬양과 남한 욕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살집이 올라 덩치가 커진 아들이 아버지한테 서운해서 부루퉁한 모습을 보고도 아버지는 '아들이 몸집도 크고 눈빛도 매서운 게 마치 북한의 높은 간부 같다'라며 속으로 감탄한다.

솔직히 이산가족이 상봉하면 보기좋긴 한데, 같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시 헤어져야되니까 더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이산가족 상봉은 어떻게 보면 과거여행과 비슷하다. 수 십년 전에 헤어졌던 가족의 얼굴을 애타게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아버지는 가짜 족보만 남긴 채 북으로 돌아간다. 그걸 받은 아들이 왜 웃는지는 잘 공감이 안된다. 아버지는 그걸 자신의 핏줄인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과거여행까지 했다. 그건 나중에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 될 텐데. 가짜라도 잘 간직했으면 좋겠다.

***

 

할머니의 소녀시절

요양원 할머니는, 과거로 가서 못다한 말을 다 하고 오신다. 요양원에서 가족들의 방문만 기다리며 하염없이 세월만 보내던 한 할머니는,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를 만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 요양원 구석에 힘없이 앉아있던 할머니가,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더니 막 호통까지 칠 정도로 기운이 펄펄 뛴다. 할머니는 당시 하고싶은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시원하게 내뱉고 돌아온다. 손녀를 '핵교'에 안 보내준 할머니, 학창시절 좋아하던 오빠, 묵묵히 사랑해준 남편, 늘 자신을 챙겨주었던 친구를 모두 찾아가 그때 다 못했던 말을 원없이 해주고 돌아선다. 특히 고마운 친구는 일본인이라서 한국말을 못알아듣는데도 한국말로 하고싶은 말을 다 하고 '이제 되었다'하는 게 웃겼다.

소설 속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남편이 일찍 죽었고, 남겨진 자식들 건사하느라 평생 고생하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요양원이 아니라 할머니 명의로 된 집에 살고 계신다. 늙었다는 건 참 서러운 일이다. 머릿 속에 수많은 보석같은 경험이 있는데, 전할 사람이 없다. 아니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요즘 할머니들도 유튜브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참 좋은 일이다. 할머니의 모습과 경험을 영원히 남겨둘 수 있으니까. 나도 며칠 뒤 할머니를 뵐 예정인데, 그때 유튜브 계정 하나 만들어드려야겠다.

***

세 개의 에피소드만 리뷰해봤다. 이외에도 엄마의 과거로 가서 아빠와의 만남을 막는 얘기, 조선시대로 간 이야기, 타이타닉 호에 탄 이야기, 마리 앙투아네트를 탈옥시킨 이야기 등 여러 얘기가 있다. 짧지 않은 소설이지만 흡입력도 강하고 공감가는 얘기가 많아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북리뷰]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 밀리의서재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리뷰 들어가면서 책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수필처럼 술술 읽히는 소설이지만, 아름다운 시 같은 구절이 많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tira.tistory.com

 

[북리뷰] 평일도 인생이니까 : 편안하게 읽는 힐링 도서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 리뷰 따뜻한 위로를 주는 책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는,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내가 게으른 건 아닐까 자책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

tira.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