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너울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리뷰
단편소설집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를 읽었다. 9개의 단편인데 각 단편마다 몰입감이 엄청나서, 여러 개의 장편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그래서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바로 다음 편을 읽지 못하고 잠시 감정적 휴식시간을 가져야 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 소설이다. 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럴수도 있지만, 심너울 스타일이 진짜 현실적인 판타지다. 정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 또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것만 같은 느낌을 줘서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은 기묘하고 붕뜬 느낌이 아니라, 아주 현실에 착 달라붙어있다. 미래 사람들도 사람이기에, 약간의 판타지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 속에서 사람냄새를 풍기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홉 개의 단편 모두 재밌게 읽어서, 각 단편을 짧게 리뷰해보려고 한다.
1. 초광속 통신의 발명
첫번째 단편 <초광속 통신의 발명>은, 이미 퇴근했는데도 자꾸 퇴근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에 착안한 어느 대학원생의 연구 이야기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나보다.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일 출근하려면 빨리 자야되는데 도무지 잠이 안 올 때, 지금이 밤이 아니라 아침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당장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상상하면 갑자기 5분만 더 자고 싶어진다. 아침의 기분을 밤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은근히 효과가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여름의 더위를 겨울로 가져오고, 겨울의 추위를 저장했다가 여름에 꺼내쓴다는 농담 같은 대사가 나온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2. SF클럽의 우리 부회장님
두번째 단편 <SF클럽의 우리 부회장님>은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소모임을 해야만 하는 어느 조직에서 일어난 일이다. 판타지 소설 덕후를 중심으로 장난처럼 만든 소모임이 우연히 대기업 그룹 회장, 아니 부회장의 주목을 받으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커진다. 그러다 술에 취한 주인공이 모두 하고 싶었지만 애써 삼켰던 부회장의 치부를 건드리며 판타지 소설 소모임은 공중분해된다. 심너울 작가는 절대 현실 속의 진짜 기업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내가 볼 땐 아닌 게 아닌 것 같다.
3.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
세번째 단편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는 길고양이처럼 중성화수술을 당한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이야기다.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는 회사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절절히 공감할 내용이다. 손예진과 장나라는 마흔이 되어도 여전히 20대처럼 빛을 내며 결혼도 쉽게 성공하지만,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의 주인공인 40대 남직원은 30대 여직원에게 들이댔다가 추하다는 평판만 얻는 슬픈 인생이다. 근데 이걸 진짜 풍자적으로 잘 풀어내서 너무 재밌다! 솔직히 이 책에서 난 이 편이 제일 재밌었다. 하지만 책 제목을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로 하지 않은 건 잘한 것 같다. 그럼 이 책이 굉장히 낭만적으로 서정적이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내용의 책일 거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책 제목이 훨씬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4. 컴퓨터 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
네번째 단편 <컴퓨터 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가 떠오르는 작품이다. 바닷가 시골마을에 있는 초등학생이 한명뿐인 어느 학교에서 벌어지는 작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유연하고 열려 있어서, 어른보다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비록 앱 '심심이' 수준의 대화밖에 할 줄 모르는 로봇친구지만, 혼자여서 외로웠던 초등학생 유림이는 금방 로봇과 친구가 된다. 가짜라는 걸 알아도 마음이 반응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기계가 해주는 위로 한마디도, 신기하게 진짜 위로가 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다. 집에 인공지능 스피커가 있다면 우울할 때 한번 내 기분을 한번 얘기하보자.
5.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다섯번째 단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이 책의 제목이자 미래에 사는 우리들을 그린 약간 슬픈 소설이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도 언젠가 연탄재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한 역지사지를 체험시켜주는 게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편이다. 이 편에서 심너울 작가는,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젊은 세대는 영원히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다. 나이들수록 이미 알고있는 게 많아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니까 말이다. 신입사원일 때는 상사에게 혼나면 눈물짓지만, N년차 직딩이 되면 혼나도 속으로 그게 내탓이냐며 반항하는 짤이 있다. 이렇게 어느 조직에 가도 사람은 경험이 쌓일수록 변화에 대한 저항이 커진다. 자기가 지금껏 해오던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섯번째 단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한동안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6. 감정을 감정하기
로봇이 감정을 가진다면 그건 인간일까? 사람은 희한하게도 한번 감정적 교류를 하고나면, 그 상대방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쓰임을 다한 기계는 폐기되어야 하지만, 인간과 감정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로봇을 과연 쉽게 폐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게 여섯번째 단편 <감정을 감정하기>다. 더 나아가 작가는 전자뇌를 이식해서 살아남은 환자는 로봇과 동일한 전자뇌를 통해서 감정을 느끼는데, 그럼 그 환자는 사람인가 로봇인가에 대한 질문까지 해서 읽는 사람을 혼돈에 빠뜨린다. 아무런 감정도 못느끼면 그 사람은 로봇같이 느껴진다. 반대로 감정을 느끼면 동물도 사람처럼 보인다. 과연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편이다.
7. 한 터럭 만이라도
일곱번째 단편 <한 터럭 만이라도>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유쾌한 소설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몰입감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흡입력으로 순식간에 읽었다. 굉장히 현실적인 소설 배경에 판타지 요소가 딱 한방울 정도 들어가있어서다.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며 용의 입김을 피하는 거대판타지보다, 이렇게 소소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살짝 비틀어 순식간에 새로운 세계로 만드는 스타일이 좋다. <한 터럭 만이라도>는, 돈에 눈먼 인간들을 가뿐하게 짓밟으며 조롱하는 똑똑한 회색앵무 이야기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 배양육은 못 먹겠다.
8. 거인의 노래
여덟번째 단편 <거인의 노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외계행성을 탐사하는, 나름 판타지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단편이다. 그래서 우주 비지엠을 들으면서 읽었더니 더 재밌었다. 아마도 작가가 남극의 눈물 같은 다큐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쓴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얼음세계는 '겨울왕국'의 엘사를 떠오르게 한다. 알 수 없는 주기로 물기둥을 뿜어대는 행성(?) '엔켈라두스'는 그 안에 살아있는 생명은 없지만 그 자체로 살아있는 별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긴 꼭 눈코입이 달려있어야 살아있는 건 아니니까.
9.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
마지막 단편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는 불멸시술을 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으로 불멸하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로 진짜 불멸하게 된 사람들을 그린다. 근데 솔직히 마지막 단편은 크게 인상깊지는 않았다. 왜냐면 불멸하는 인간들이 딱히 뭘 하지 않고 한가롭게 영화감독이나 하고 자빠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짧은 생을 바쳐 업적을 이룬 언니를 보고 감명받은 동생이 그제야 위대한 연구에, 불멸인들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연구에 착수하긴 하지만 말이다. 근데 진짜 불멸한다면 큰일이다. 대부분은 노후대비를 하기 힘들 것 같다. 정말 기본소득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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