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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정세랑 < 시선으로부터,> 리뷰

by 티라 202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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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리뷰

시선으로부터,

 

책 <시선으로부터,>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다분한 소설이다. 솔직히 페미니즘이 특이한 사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남성 작가들이 출판한 책들이 전부 매니시즘(!)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무게를 둔 책이 색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책 맨 앞에 나오는 가계도는 주인공 '시선'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시선의 두 남편들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과 손녀들을 보여준다. 처음엔 왜 가계도가 있을까 의아했는데 읽다보니 누가 누군지 헷갈려서 여러 번 가계도를 들춰보면서 읽었다. 책의 주인공 '시선'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리저리 상처받으면서도 모든 걸 이겨내고 굳건히 살아온 할머니다. 그러나 시선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대신 모든 챕터는 그가 쓴 글 발췌문으로 시작한다. 그런 구성이 뭔가 좋았다. 시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할머니와는 많이 다른 할머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아들과 남편과 손자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말수도 적고 조용히 아내와 딸과 누나들의 뒷배경이 된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건 할머니, 딸, 손녀다. 며느리도 별 존재감이 없다. 이 집안의 핏줄이 아니고,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오로지 시선의 딸들과 손녀들이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소설이다. 

 

책 <시선으로부터,>에는 작가 할머니가 주인공이라 그런지 좋은 문장들이 많다. 작가는 아직 젊은이인데 어떻게 인생 다 산 할머니의 통찰력이 담긴 문장들을 구사해내는 걸까. 곳곳에 등장하는 그런 문장들이 참 매력적이다. 나는 이런 문장들이 많은 책이 참 좋다. 그 문장들만 나중에 다시 읽어도 갑자기 확 다른 세계로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작가는 잔잔한 문장을 통해 평화로운 여행의 한 조각을 묘사하기도 하고, 날카롭게 인생을 관통하기도 한다. 정세랑 작가는 하와이 바닷가에서 만난 청년들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두 사람은 물개처럼 누워서 웃다가,
이어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좀 더 하다가 낮잠에 빠졌다.
그것은 등을 붙인 땅에 연결되는 듯한 부드럽고 깊은 잠이었고
깨어났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자는 첫째딸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가족들은 모두 하와이로 떠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하와이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족들은 각자 자신이 보고싶은 하와이의 단면을 찾아 흩어진다. 남편과 아내조차도 서로 가고싶은 장소로 갈라진다. 그래서 난 하와이에서 서핑도 하고 다이빙도 하고 팬케이크도 먹고 화산섬도 가보고 미술관, 박물관도 가고 훌라 춤도 추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하와이의 신화, 역사, 나무, 커피, 환경오염, 새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여성 작가가 하와이에 대해 묘사하는 게 꼭 요시모토 바나나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 여성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제목이 지금 생각이 안나는데, 그 소설도 약간 이런 분위기로 하와이를 묘사한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에는 소년소녀의 풋풋한 사랑이 나오고, 주인공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정체성을 가졌다. 반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할머니 '시선'의 강력한 영향력이 소설 곳곳에 뿌리내려있고, 그 딸과 손주들도 각자 할머니와의 연결점을 갖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여성이 살기 힘든 시대에 외국에서 동양인으로서의 차별까지 견뎌내며 살았던 여자 '시선'은, 글을 통해 담담히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실 시선 할머니 뒤에는 작가 정세랑이 있다. 아니 도대체 인생 몇 회차세요!?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항상 직선으로만 가면서 매혹적으로 비틀린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있던 나를 격려하는 말 같다. 단조로운 직선에서 벗어나 뒤틀려 있는 사람은, 언뜻 신비하게 보이고 동경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들을 환상(어쩌면 편견)을 갖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고 멋있어 보인다. 시선은 환상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향하는 어린 양들을 구제하기 위해 저런 말을 남기고 간 것 같다. 

 

책 표지에 있는 파란 돌은 뭘까? 내 생각엔 하와이를 상징하는 것 같다. 파란색은 하와이의 아름다운 바다와 서핑을 떠올리게 한다. 하와이는 대표적인 휴양지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울함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울증이 있는 첫째 손녀 '화수'가 가장 파란 돌 그림을 좋아하고 오래 감상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도 그걸 알고 그림을 화수에게 물려주었다. 그림 속 파란색은 우울한 파랑색이 아니라 산뜻한 파란색이긴 하지만, 파란색은 서양에서 우울함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그리고 실질적인 책의 주인공 '시선'이 남기고 간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선이 낳은 자식과 손주들도 그가 세상에 남긴 흔적들이고, 책의 챕터 첫머리마다 시선이 남기고 간 글이 등장하니까 말이다. 

 

책 <시선으로부터,>는 '성북구 한 책' 후도보서다. 다른 후보도서로는 '어린이라는 세계', '유원', '천 개의 파랑'이 있다. 우연히 성북문화재단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성북구 한 책'이라는 걸 알게 돼서 후보도서를 빌려서 읽는 중이다. 성북구에서는 여러가지 문화 활동을 많이 장려하고 추진하는 것 같다. 성북구 주민들의 열정으로 선정된 도서라서 그런지 재밌게 읽었다. 비록 내가 관계자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성북구에서 문화예술에 예산 지원을 팍팍 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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