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명 <부서진 여름> 리뷰
지수를 바라보는 더러운 시선
책 <부서진 여름>은 주인공 '한조'의 충동적인 거짓말이 옆집 친구 '지수'를 자살하게 만든 이야기다. 책 분위기는 작가가 남자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 남자는 예술적 재능이 있음에도 한없이 나약하고 못났고 찌질하게 그려지는 반면,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와 형 '수인'이 좋아하는 여자는 모두 여신처럼 아름답고 부드럽고 신비로운 환상 속의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이 소설을 읽는 내내 더럽게 느껴졌다. 하얀 손목, 가느다란 실핏줄 등 10대 소녀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부추기는 장면이 많다. 게다가 한조는 실제로도 10대 소녀와 관계를 갖는다. 본인은 10대인줄 몰랐다고 하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사람의 핑계일 뿐이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미성년자인 지수를 성적 대상화하는 부분이 읽는 내내 강하게 나와서 기분이 찜찜하고 더러웠다. 한조의 그림 속 오필리아로 묘사된 지수의 모습은 심지어 자살해서 죽은 모습임에도 성적으로 묘사된다. 강에 빠져 죽은 지수가 물과 진흙에 잠겨 있는 모습을 한조는 그림으로 표현한다. 소설 속에 그림이 삽화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독자로서 받은 느낌은, 그냥 여리여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10대 소녀가 고요히 죽어 있는 모습조차 성적 흥분을 느끼도록 더럽힌 느낌이었다.
지수와 수인
한조는 지수에게, 지수가 좋아하는 수인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지금 그 여자와 함께 별장에 있다고 말한다. 한조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지수가 죽었다고 자책하지만 그건 거짓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수인은 정말 지수 엄마를 좋아했고, 지수 엄마와 함께 별장에 있었다. 그걸 지수가 보고 충격받고 자살했지만 그게 한조 때문은 아니다. 지수 엄마가 수인과 성관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안아준건데 그것만 보고 자살한 건 좀 과한 것 같다. 지수가 엄마와 다툴 정도는 되지만, 자살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지수와 수인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망한 지수에게서 검출된 체액은 수인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지수와 수인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지수 혼자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지수가 수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좌절해서 자살까지 가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지수는 확실하게 수인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으로 자살하게 되었다면 그제야 설득력이 생긴다. 그래서 지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수인이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한 것이다.
지수 아버지와 지수
수인과 한조의 아버지 '이진만'은 왜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감옥에 갔을까? 그는 자신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지수를 죽였다고 오해했던 것 같다. 사실 지수는 자살한건데, 지수 아버지가 길길이 날뛰며 자살은 절대 아니라고 광분하는 바람에 경찰에서도 자살 가능성을 덮어놓고 타살로만 수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힘없는 이진만은 지수의 자살 가능성을 밀어붙일 수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자신의 아들들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용의자는 이진만과 두 아들 뿐이었다. 지수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외딴 섬에 접근 가능한 남자들은 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체액이 검출됐다고 해서 사실 난 지수 아버지도 살짝 의심하긴 했다. 어쨌든 그 사람도 성별이 남자고, 지수에게 언제든 접근할 수 있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지수가 가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고 했다는 것도 의심의 원인이었다. 지수가 수인과 서로 좋아한다고 착각한 원인은 둘 사이의 성관계가 아니라 수인이 지수에게 과외를 해줬기 때문일수도 있다. 수인은 굉장히 냉철하고 똑똑한 아이라서 쉽게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하지 않을 아이라는 말도 소설 속에 나온다. 지수 아버지가 길길이 날뛴 이유도 자신의 성폭력 때문에 딸이 자살했다는 걸 외부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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