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현 <숨어있기 좋은 방> 리뷰
1994년에 출간된 소설 <숨어있기 좋은 방>은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현대적이고 날카롭게 현실을 꿰뚫고 있다. 주인공 '이금'이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세상만사를 다 비판적이고 염세적으로 바라본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놀러다니며 술만 마시는 현실에 회의감을 느껴 자퇴하고, 결혼을 하고서도 가족에 정착하지 못하고 뜻밖의 연애를 꿈꾸며 나돌아다닌다. 이런 주인공의 알수없는 방랑벽은 수년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의 역마살을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정을 꾸릴 자격이 없다. 주인공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자신을 속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언뜻 보면 쟤는 왜 저럴까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마음 속으로 꿈꾸는 삶이 바로 한없이 자유로운 삶 아닌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사실은 주인공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그걸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난 첫페이지 작가의 말부터 벌써 감동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숨어있기 좋은 방과 그 안에 있는 한 명의 남자'라는 파격적인 작가의 말에, 지금까지 나를 묶어왔던 온갖 속박의 굴레가 다 날아가버리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 거칠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최소 30평대 아파트와 4인용 승용차 한대와 멀쩡한 직업을 가진 배우자와 웬만큼 공부하는 자녀를 거느려야 정상인 취급을 받는 이 각박하고 숨막히는 세상 속에서(!) 작가는 단호하게 모든 걸 내던지고 방 하나와 남자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충격을 준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실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모든 것은 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필요한 것일 뿐이었다. 학벌, 직업, 배우자, 자녀, 집, 차... 사실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배우자와 자녀를 돌보며 사는 삶이 얼마나 많은 쇠사슬에 묶여 사는 건지 다들 알면서도 묵인한다. 주인공 '이금'은 이런 현실에 반항하며 거친 방법으로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다.
주인공의 선택
주인공 '이금'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자유를 상징하는 여관소년 '태정'과, 안정을 상징하는 대기업 다니는 남사친 '휘종'이다. 결혼은 현실이다. 이금은 휘종과 결혼하지만 후회한다. 결혼 전에는 휘종이 백마 탄 왕자님 같았지만, 결혼 후에는 지독한 현실이 된다. 결혼 전 휘종은 이금이를 백화점에 데려가 원피스도 사주고, 이금이가 원하는 차를 뽑아서 드라이브를 시켜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휘종은 이금에게 자신이 살던 인생에 그대로 녹아들어 집안일 하기,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기, 휘종이 원할 때 언제든 성관계하기를 요구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휘종이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둘의 결혼생활은 뭔가 이상하다. 이 결혼엔 사랑이 없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지속하려면 휘종은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제공하고, 이금은 휘종의 삶을 잘 보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금은 안락한 가정을 뛰쳐나와 아무것도 없는 태정에게 달려갈 정도로, 사랑 없는 인생을 견디지 못한다.
자유를 찾아 떠난 주인공은 자유를 얻는다. '태정'은 일정한 직업도 없고 부모도 없는 자유의 몸이다. 그리고 이금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순종적이다. 근데 돈이 없다. 알고보니 태정은 성매매하는 여동생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남자였다. 그는 이금에게 안락한 가정을 절대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금은 잠깐 태정이를 만나 자유를 맛보다가, 다시 원래 가정으로 돌아가 안락함을 누리다가, 숨막혀하며 다시 태정을 찾아 떠나기를 반복하며 태정과 휘종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완전 인생 막 사는 여자다. 우리는 가끔 인생 막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만,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런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작가는 '이금'이라는 인물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준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듯 살아버린 인생의 결과는 무소유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자유롭다.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는
남의 인생과 비교하며 내 인생이 그래도 낫다고 자위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렇게 된다. 속박을 견디지 못해 자유를 향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이금이의 인생이 점점 나락으로 치닫는 꼴을 보다보면, 열심히 살아가는 내 인생이 그래도 괜찮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막 사는 이금이의 자유분방함이 부럽지만, 마지막에 동남아 연하남과 결혼하여 매년 홍수를 견뎌내는 중년의 이금이를 보면 기묘하게 승리한 기분이 든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자유롭게만 살 수 는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뿌리내리길 원하는 종족이다. 이금이도 결국엔 정착했다.
남과 비교하면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비교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과 내 인생이 머릿 속에서 교차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건 인생의 진리다. 이금이는 자유롭게 대학도 직장도 가정도 때려치우고 아무나 만나 잠자리를 갖는 자유의 끝판왕이지만, 그에게는 안락한 보금자리가 없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의지가 되는 가족도 없다. 자유를 얻는 대신 다른 것을 잃은 것이다. 성매매하던 태정의 여동생조차 나중에는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된다. 이금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금이는 남들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고, 누구와 비교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94년도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다. 게다가 이게 데뷔작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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