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리뷰
책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기나긴 릴라와 레누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근데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다. 애매하게 끝났다. 마치 소설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미적지근하다. 소설인 척하는 일기장이 아닌가 하는,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다.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한 느낌이다. 마무리가 영 찜찜하게 끝나버렸다. 1권에서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릴라를 4권에서는 다시 찾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 하나로 이 길고 기묘한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왔는데 솔직히 좀 실망이다. 그래서 릴라가 결국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는 무책임한 말로 작가는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자기 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엘레나 페란테'라는 가명 뒤에 숨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헛헛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추측해보자면, 아무것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는 릴라가 자살했다는 암시이거나 레누가 애초에 릴라를 찾을 마음이 없어서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은 걸수도 있다. 레누는 1권에서와 달리 4권에서는 릴라의 놀라운 재능을, 이미 소진해버린 자신의 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번 되살리기 위해 이용하려는 마음밖에 없었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있다. 릴라와 레누가 죽을 때까지 아름답게 우정을 쌓아나가는 소설 같은 이야기면 참 좋았겠지만, 작가는 무너져가는 두 사람의 우정을 잔인하도록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책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잃어버린 아이'는 릴라의 딸, '티나'다. 릴라는 자신의 어머니 '눈치아티나'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짓고 애칭으로 티나라고 부른다. 레누도 시어머니와 여동생과 어머니 이름을 따서 딸들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름을 딴 사람들과의 관계가 돈독해지지는 않았다. 그냥 이름 짓기 귀찮아서 대충 주변사람 이름을 따온 것 같다. 릴라는 자식을 잃고 정신도 잃는다. 고향 마을 미친여자 '멜리나'처럼 정신나간 늙은 여자로 전락한다. 소설을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인데, 아무래도 릴라는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어야 할 운명이다. 근데 신내림을 받지 않아서, 아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평생 고통받으며 살았던 것이다. 릴라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아 깊이 숨겨둔 속마음도 꿰뚫어보고 그들의 먼 미래도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레누의 딸도 릴라 이모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기 전부터 무당이 아닌가 싶었는데 선견지명이 있다는 문장을 읽고 더욱 내 짐작에 확신이 섰다. 릴라는 소설 내내 신경질적이고 똑똑하지만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마녀 같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릴라는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약삭빠르게 이용해먹지도 않는다. 릴라는 주변의 사람과 사물이 경계를 잃고 뒤흔들리며 섞인다고 말한다. 경계의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이 살면서 종종 릴라를 찾아온다. 릴라는 그런 사실을 절친 레누에게 털어놓지만, 레누도 이탈리아 할머니라서 한국의 신내림이나 무당 개념을 알지 못해서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릴라는 사람들이 '이름'이라는 끈으로 묶인 불분명한 실체라고 말한다. 이름이라는 끈이 끊어지만 실체를 잃고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정말 기묘한 사람이다.
책 <나의 눈부신 친구>부터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내내 존재감을 강하게 발휘하는 인물은 '니노'다. 정확한 이름은 조반니 사라토레다. 작가가 모든 인물을 짧은 애칭으로 불러서 참 다행이다. 인물들이 풀네임으로 등장했다면 굉장히 헷갈렸을 것 같다. 릴라, 레누, 니노, 카르멘, 파스콸레, 엔초, 마리사, 임마, 엘사, 엘리사, 데데, 리노 등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소설 읽는 중간중간에 계속 가계도를 확인하면서 읽어야했다. 아무튼 니노는 10대 때는 결혼한 유부녀 릴라와 바람이 나더니, 그후에 결혼해서 애까지 낳은 유부녀 레누와도 바람이 난다. 게다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별이 여자이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피임도 안해서 니노의 아이들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뿌려진다. 그와중에 릴라는 니노의 아이가 없다. 레누에게는 '임마'라는 니노의 아이가 생긴다. 그 외에도 엘레오노라의 아이들, 실비아의 아이 미르코 등 수많은 니노의 아이들이 탄생한다. 이런 인간이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되다니 정말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레누는 니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모든 걸 참아주고 그와 가정을 꾸리다가, 그가 늙은 가정부와 화장실에서 바람을 피우는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그제야 니노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딸 임마 때문에 니노와 연락하게 된다. 니노는 매력적인 미소년에서 잘생기고 똑똑한 청년을 지나 유능한 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더럽고 비열한 욕망 덩어리 의원이 되어 감옥에 가는 등 추하게 늙어간다. 성실하게 살지 않은 댓가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니노는 그렇다치고, 죽어라 열심히 살았던 릴라 인생은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엔 신내림을 받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구두 만드는 장인부터 예술가(신부 사진의 재구성), 작가(엄청난 독서량), IT 기업 임원(기술력과 경영 능력과 인맥과 리더십) 등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릴라의 인생은 결국 아이를 잃고 정신 나간 시골 촌구석 할머니로 끝이 난다. 엔초는 티나를 낳고 머릿속에 불이 탁 켜진 느낌이었는데, 티나를 잃자 그 불이 꺼진 기분이라고 고백한다. 차라리 티나가 죽었다면 장례식이라도 치르고 마음을 정리했을텐데, 실종되었기 때문에 릴라는 10년이 지나도 언제라도 티나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삶이 점차 무너져내린다. 무너지는 릴라를 견디지 못하고 그 성실하고 우직했던 남자 엔초도 떠나버린다. 릴라가 무너진 이유는 뭘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서? 아니면 뛰어난 능력에 비해 욕심이 너무 없어서? 신경질적이고 직설적인 사회성 없는 성격 때문에? 티나를 잃어버려서? 끊임없이 친구로서 레누에게 영감을 주던 놀라운 친구 릴라는 그렇게 점차 퇴색되어가다가 결국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너무 안타깝다. 릴라는 평생 고향 나폴리를 떠나지 못한다. 컴퓨터 회사 팔아서 번 돈 갖고 나폴리를 떠났다면 좀 달라졌을까.
책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정작 잃어버린 아이 '티나'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아이를 잃은 릴라의 슬픔이 딱히 부각되지도 않는다. 티나와 상관없이 레누와 릴라의 인생이 계속해서 흘러갈 뿐이다. 그들과 그 아이들의 인생을 보면, 애인이나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건 무슨 수를 써서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커다란 강물의 흐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간밤에 내린 비에 불어난 강물이 댐을 뚫고 터져나와 큰 홍수를 일으키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은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애초에 작은 호감조차 만들지 않으려고 모든 이성과 손절하고 사는 사람, 작은 호감을 적당히 즐기며 이건 사랑이 아니라 친구로서의 호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 그리고 소설 속 인물처럼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람과 불륜에 빠지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바람과 불륜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바람 피우고 불륜을 하는 그 당사자의 마음은 당사자만이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 피우는 애인과 배우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는 것은, 리모컨이 상대방 손에 있는 티비의 채널을 내가 원하는대로 바꾸려고 애쓰는 거나 마찬가지다. 7번 채널을 틀어달라고 목놓아 외쳐도, 결국 몇번 채널을 볼지는 리모컨을 손에 쥔 사람이 결정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채널고정을 외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잘해주든지 못되게 굴든지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세월이 흐르고 나와 상대방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고 이에 따라 가치관도 변한다. 이런 거대한 흐름을 담담히 보여주는 게 바로 엘레나 페란테의 4부작 소설이다. 결국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는 교훈을 준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 사람이 가진 재산과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그 사람이 생전에 했던 말과 행동밖에 없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그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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