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리뷰
책 <나의 눈부신 친구>는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4부작 성장소설 중 첫번째 편으로, 주인공 '레누'와 절친 '릴라'의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룬다. 난 책으로 먼저 접했는데 왓챠플레이에서도 드라마로 제공된다니 너무 행복하다. 책을 다 읽고나면, 아니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이런 대작(!)은 영화나 드라마로 꼭 나와줘야한다는 작은 소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저 책 표지의 두 소녀 얼굴표정만 봐도 누가 릴라고 누가 레누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릴라는 어릴때부터 소름끼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자기방어적인 면모를 보이다가, 자라서 여성이 되고 인기가 많아지자 우아하면서도 기품있고 도도한 느낌으로 변한다. 레누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에서 죽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 된다. 레누가 죽도록 공부하는 계기는 머리좋은 친구 릴라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아마 레누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학생이라면, 릴라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하버드에 가는 수준이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릴라의 학업은 좌절된다. 릴라의 아버지는 공부하겠다는 릴라를 창밖으로 집어던진다.
선과 악은 혼재되어 있고
선은 악에 의해서,
악은 선에 의해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라고.
다시 생각해보면
마르첼로와 결혼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옳은 일은 쓰디쓴 법이고,
잘못된 일은 달콤한 법이다.
릴라는 가난 때문에 가족들에게서 극심한 압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 릴라의 아버지와 오빠는 릴라와 결혼하기 위해 돈을 퍼주는 남자들의 구애를 달콤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이지만, 릴라는 원치 않는 남자와의 결혼 압박에 극심한 고통과 번뇌를 겪는다. 결혼 때문에 고통받는 릴라의 나이는 겨우 중고등학생 정도다. 옛날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 사람들은 초등교육만 받고 바로 일자리에 뛰어들었고 중등교육을 받아도 계산기를 두드릴 줄 아는 곳에 취업할 뿐이었다.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스무살, 서른살까지 허리가 휘도록 학비를 대는 것은 꿈도 못 꾸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에게 이탈리아 나폴리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관광지지만, 릴라와 레누에게는 가난 때문에 폭력과 광기에 찌든 동네일 뿐이다. 여유롭고 넉넉한 인품은 일정 수준의 교육과 경제력에서 나온다. 가난한 나폴리 동네는 거의 사바나 초원 같은 야생의 공간이다. 남자들은 길을 지나는 소녀들에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고 그런 여자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고 아버지나 오빠, 남자친구에게 의지해야 한다.
책 제목 <나의 눈부신 친구>는 레누에게는 릴라, 릴라에게는 레누를 의미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릴라와 레누는 자매애(sisterhood)를 지녔다고 말한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절친 관계다. 레누와 릴라네 집은 둘다 가난하지만, 선생님에게 순종적인 레누와 달리 릴라는 반항적이었다. 사실 릴라가 일부러 선생님에게 도전한다기보다는, 명석한 두뇌와 직설적인 성격이 만나자 잘못된 발언을 하는 선생님을 그냥 두고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올리비에 선생님은 레누 부모님만 교육을 계속 하라고 설득하고 릴라 부모님은 끝까지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서 똑같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뛰어난 두뇌를 가졌는데도 릴라는 초졸이 되고 레누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초졸임에도 날카로운 통찰력과 상황판단력 덕분에 릴라에게 반한 수많은 남자들은 순간적으로 릴라가 레누를 앞선 것처럼 보이게 한다. 릴라가 부잣집 남자들의 구애를 받고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본 절친 레누는 공부에 허망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죽도록 공부를 계속 한다. 그나마 공부라도 잘해야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릴라는 레누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릴라는 가족들의 압박과 가난 때문에 억지결혼에 떠밀린다. 릴라는 원치않는 현실을 겪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명석하던 유년기 시절의 자아를 버린다. 이를 본 선생님은 그때 겨우 초딩이었던 릴라와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교육을 계속하도록 릴라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우울증에 빠진다. 그리고 릴라의 지적인 아름다움이 가슴과 궁둥이로 모두 가버렸다며 통탄한다.
릴라만큼은 아니지만 레누도 방황한다. 나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주는 남자 '안토니오'도 아니고, 학교 친구로서 무난하게 잘 통하는 '알폰소'도 아니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지만 자신보다 지적 수준이 높은 '니노'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그러나 니노 아버지인 도나토 개저씨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 때문에 쉽게 니노와 가까워지지 못한다. 다행히 니노는 아버지가 개저씨라는 걸 알고 아버지와 선을 긋지만 그의 재능은 물려받아 논리적인 글쓰기를 좋아한다. 니노와 레누의 이야기는 1부에서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2부 이후에나 나올 것 같다.
책 <나의 눈부신 친구>는 소녀들의 우정이 주된 스토리다. 레누가 주인공이지만 릴라도 거의 주인공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레누가 2인칭 시점의 서술자고 진짜 주인공은 릴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레누와 릴라는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의 운명을 동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눈앞에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멋진 아이들이다. 엘레나 페란테 작가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는 아름다운 도시 나폴리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낱낱이 드러내는 소설이다. 그리고 엄청난 필력을 갖고 있어서 문장마다 입에 착착 감기고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수백페이지임에도 순식간에 다 읽게 된다. 그런데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조건 서면 인터뷰만 한다고 한다. 이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치열하게 소설을 써내는 작가는 강하고 깊게 오랫동안 내면으로 침잠해야 하는데, 그런 극도로 내향적인 인간이 방송에 나오고 인터뷰를 하는 게 더 어색하다. 1부가 너무 재밌어서 2부를 바로 읽고 싶었지만 그럼 1부에 대한 리뷰를 쓰기 힘들어질까봐 여기까지만 쓰고 2부를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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