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리뷰
책 <우리가 녹는 온도>는 정이현 작가의 산문집이자 엽편소설이다. 엽편소설은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낙엽' 같은 소설을 말한다. 책 사이사이에는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난 전자책으로 읽어서 흑백으로 봤는데도 사진이 주는 느낌이 좋았는데, 실제로는 컬러라 더더더더더욱 예뻤다(!). 책을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사진들이다. 문장들도 사진처럼 잔잔하게 마음을 울린다. 한편 한편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모든 소설이 다 마음을 울리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중 마음에 와 닿았던 한 문장을 적어본다.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사라진 것들'은 녹아버린 눈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눈사람이 녹지 않길 바라는 어린시절 우리의 동심도 나타낸다. 책 제목 '우리가 녹는 온도'도 눈사람을 의미할수도 있지만, 난 다른 부분이 더 와 닿았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작은 호의를 베풀 때다. 언 마음을 녹인다는 표현은 서구권에도 있다.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다. 눈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녹는 온도, 그 사람이 내게 마음을 여는 지점이라는 뜻이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녹는 점과 어는 점은 같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부드럽게 마음이 녹아있다가도, 상처주는 말 때문에 어는 점에 도달하면 다시 마음이 얼어붙을 수도 있다.
완벽하지 않은
사소한 중간 결말과 결말들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어쩐지 이 책을 묘사하는 문장같다. 작은 엽편 소설들이 결말을 열고 닫으며 흘러간다. 그리고 하나의 결말이 닫힐 때, 부드럽게 이어지는 작가의 해설 같은 에세이도 너무너무 좋다. 분위기 있는 와인 한 잔 같은 책이다. 과격한 표현도 없고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도 없지만, 다 읽고 나면 마음 속에 또렷한 자국을 남긴다. 작고 가벼운 하나의 낙엽 같은 엽편소설인데도, 한 개의 결말이 나올 때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길지 않은 내 인생을 돌아보기도 하고, 엄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와중에 은은한 사진까지 내 마음을 흔든다. 쳇바퀴 같은 회색빛 일상에 잠시 휴식을 주는, 한 잔의 커피 같은 책이다. 완벽한 건 중요하지 않다. 결말들을 열고 닫으며 어딘가로 열심히 흘러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책 <우리가 녹는 온도>에서는 정이현 작가의 필력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구성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고 나면 어떤 경험에서 그 장면이 나왔는지 바로바로 보여준다. 그때 느꼈다. 같은 문장, 같은 경험인데도 소설 속에 있을 때는 소설 같은 느낌이 났는데 수필 속에 있으니 수필 같은 느낌이 확 났다. 문장의 앞뒤로 어떤 문장이 오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딸기를 먹었다'는 문장이 소설 속에서는 굉장히 심오하고 묘한 느낌을 줬는데, 그 다음에 오는 수필에서는 다이어리에 쓴 낙서처럼 가볍고 평범한 느낌을 준다.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책 <우리가 녹는 온도> 낭독 영상을 가져와보았다. 참 좋다.
▶ 『우리가 녹는 온도』 북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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