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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김이설 <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리뷰

by 티라 2021.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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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리뷰

 

우리의_정류장과_필사의_밤

책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수필처럼 술술 읽히는 소설이지만, 아름다운 시 같은 구절이 많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를 시적으로 재해석한다. 집안살림을 하는 고달픔을 '그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길에 대해서' 와 같이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한 건 아니다. 오히려 결혼과 육아의 현실을 너무 현실적으로 보여줘서 숨이 막힌다. 이때 엄마가 아닌 '이모'가 육아를 한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온다. 엄마들이 호소하는 돌봄노동의 어려움은, 엄마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무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아직 미혼인 주인공이 호소하는 육아와 살림의 고통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

 

어느 취준생의 이야기

주인공은 MBTI 테스트를 하면 반드시 I가 나올 것 같은 유형이다. 집구석에 콕 박혀서 시집만 읽어대는 아이였다. 극단적으로는 대학입시도 떨어지고 취업도 못하고 마흔이 되도록 시인의 꿈만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한심해보이지만, 책은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꽤 진지하다. 시를 좋아하는 재능을 광고 카피라이터로 이용했다면 좋았을텐데, 주인공은 자신이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살며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옭아맨다. 시인은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이 안되는 건 무시당한다.

이런 주인공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건 동생 뿐이다. 동생은 학비까지 대주면서 시를 공부하게 해준다. 공부라는 단어는 참 신기하다. 돈이 아깝지 않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왠지 뭔가를 공부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면 기꺼이 돈을 대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학생 때 공부는 끔찍한 단어지만, 어른의 공부는 멋지게 느껴진다. 일률적으로 획일화된 기준에 맞춰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설정한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에서 서점 직원과의 로맨스가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다. 소설의 시작은 이별이지만 끝은 왠지 해피엔딩인 듯하다. 아이 키우는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연애를 포기했던 주인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정신 차리고 독립을 한다. 마흔에 독립이라니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이 주는 자유와 자기통제감은 생각보다 훨씬 즐겁다. 끈적한 물체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내게 선택권이 있는지 여부는 내 행복과 직결된다. 주인공은 독립을 통해 시도 쓰고 데이트도 하면서 점차 삶의 여유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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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책 속의 주인공은 시 구절을 필사하지만, 난 이 책을 필사하고 싶다. 그만큼 예쁜 구절이 많이 나온다. 누군가의 이별일기처럼 담담하게 시작하지만 점점 몰입력을 더해가다 마무리까지 깔끔한 소설이다. 어려움을 겪다가 행복해지는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는 항상 개운한 느낌을 준다. 대리만족일수도 있고 완벽주의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해피엔딩이 좋다. 평범한 일상 한 조각도 아름다운 시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리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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