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리뷰
일본소설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의 주인공 '이시가미'는 전형적인 일본 중년남자다. 일본 중년남자는 절대 왁자지껄하거나 장난스럽지 않다. 나의 일본에 대한 편견에 따르면, 일본 남자는 '남성'보다는 '미소년'에 가까운 체형이 더 많다. 그래서 일본여행 후 스모 선수를 존경하게 됐다. 날 때부터 개말라 인간인 유전자를 극복하고 그렇게 덩치를 키웠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본남자는 체구도 작고 왜소하고 가냘픈 소녀같다. 그리고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한 초식남이 많다. 오죽하면 조용히 혼밥하는 중년아저씨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이 대유행을 했겠는가. 아무튼 그런 나의 일본 남자에 대한 편견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런 소설이다.
이시가미는 조용히 혼자 집에서 수학문제를 푸는 걸 좋아하는 일본 아저씨다. 그런 특기를 살려 수학교사로 먹고 산다. 그리고 내성적인 사람 종특은 관찰력이 좋다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 직접 부딪치지 않고, 관찰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는 걸 더 선호한다. 그런 성격 탓에 자연스레 통찰력이 높아져서 어떤 사람을 보면 굳이 대화해보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온다. 최소한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일초만에 파악해낸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인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하고만 조용히 재미있게 둘이서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려면 억지로라도 최소한의 외향성은 갖추어야 한다. 마치 극단적으로 쾌활하고 외향적인 사람도 적당히 자제하고 참아야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짝사랑과 스토킹은 다르다
타고난 내향성에 따라 살다보면 연애와는 자연스레 멀어진다. 이시가미도 인간여자가 아닌 수학문제와 연애하는 고독한 아저씨다. 그는 자주 가는 도시락 가게 직원에게 반해 일부러 길을 돌아서 출근할 정도지만, 제대로 고백할 용기와 말재주가 없다. 소설이라서 그런지 정말 우연하게도 그 도시락 가게 직원 '야스코'는 이시가미 옆집에 산다. 내성적인 아저씨 이시가미는 이웃집 사람으로서 최대한의 관찰력을 동원해 야스코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야스코 입장에서는 찌질하고 소름끼치는 스토커다. 근데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는 2005년으로 16년 전이다. 지금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덜 발달했고, 일본은 한국보다 더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편이다. 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권리를 쟁취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고 청순하고 귀엽기만 하면 사랑받는다. 한마디로 똑똑한 여자를 꺼리고 아무 생각없이 귀엽기만 한 여자를 선호한다. 그래서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이시가미는 소름끼치는 옆집 스토커로 당장 112에 신고해야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순수한 짝사랑에 빠진 고독한 아저씨다.
소설의 결말에서는, 이시가미가 야스코를 위해 전남편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감옥에 간다. 하지만 난 이 결말을 보고 나서도 마음이 계속 찝찝하고 불쾌했다. 아무리 살인죄를 덮어준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분명 스토커다. 도와주려는 의도였더라도, 몰래 훔쳐보고 훔쳐들었다는 사실은 소름끼치는 범죄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시가미가 정의로운 마음으로 야스코를 도와주며 남 모르게 마음속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걸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오히려 더 찜찜했다. 야스코 입장에서는 생판 남이 자신의 엄청난 죄를 아무 이유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뒤집어쓴 것이다. 이시가미 입장에서는 오래 좋아하던 여인이었겠지만 야스코 입장에서는 전혀 모르고 살던 아저씨다. 자신이 전남편을 죽이자마자 그걸 엿듣고 옆집 아저씨가 달려와서 수습해주면 난 더 소름끼치고 무서울 것 같다.
배우자 폭행 및 금품갈취사건
결혼할 때는 기본적으로 사랑과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돈만 보고 결혼하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술집에서 일하던 야스코는 돈이 많은 사업가를 만나 명품백 선물공세를 받은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을 택한다. 그러나 비극은 이혼 후에도 멈추지 않는다. 야스코와 딸은 전남편의 폭력과 갈취에 계속해서 고통받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죽인다. 그는 지속적으로 찾아와 야스코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간 나쁜 인간이므로 죽어 마땅하고, 야스코가 그를 죽였다고 해도 정당방위로 풀려나야 독자들 속이 시원하지만, 법이 그렇지가 않다. 일단 사람을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로 인정받으려면 미국에 가서 판결받아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패는 폭행은 분명한 범죄임에도, 이상하게 위 단어들은 그 심각성을 완화시킨다. 성폭력도 '폭력'보다 '성관계'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가정폭력은 '배우자 폭행사건'으로, 데이트폭력은 '연인 폭행사건'으로, 성폭력은 '주요 신체부위 폭행사건'으로 바꿔야 그 심각성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내가 범죄용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술 취하거나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가끔씩 집에 들러 돈을 빼앗아가거나 가족들을 때리는 소재는 책 <용의자 x의 헌신> 외에도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이것은 그냥 못난 아빠의 방황이 아닌, 명백한 폭행 및 금품 갈취사건이다. 그냥 가족이니까 맞아도 참아야하고 돈을 빼앗겨도 이해해줘야 한다는 인식은 굉장히 잘못되었다.
결말이 과연 해피엔딩일까
소설에서 야스코는 끝까지 이시가미에게 어떤 이성적인 호감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고마움만 표시하는데 난 더 무서울 것 같다. 야스코는 예쁘고 참한 성격이라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시가미가 도와주는 그 과정 속에서도 다른 남자에게 대쉬받아 연애를 한다. 그러니 이시가미가 형을 살고 나왔을 때도 야스코는 다른 남자와 사랑하면서 잘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걸 알게 된 이시가미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자신이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써줬는데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다른 남자와 잘 살고 있는 야스코를 보면 분노하지 않을까. 그냥 좌절하고 포기하면 다행이지만 이시가미는 머리도 좋고 내성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 앙심을 품는다면 얼마든지 야스코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래서 난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느꼈다. 새까만 책 표지처럼, 정말 새까만 마음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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